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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결혼생활

나쁜 남자 세조

by 하늘이5 2024. 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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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왕후는 파평 윤 씨로 조카를 죽이고 무력으로 왕위를 찬탈한 세조의 정실부인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겨우 선조의 은덕으로 관직에 진출할 수 있었다. 그것도 부정축재로 쫓겨났다. 이런 배경을 가진 집안이 왕의 둘째 아들인 세조와 결혼할 수 있었을까?

 

세종의 첫 번째 아들 문종세자는 두번의 이혼과 3번의 결혼이 있었기 때문이다. 첫번째 세자빈은 남편을 그리워하며 주술행위를 하다 폐비가 되었고 두 번째 세자빈은 외로운 마음에 궁녀와 함께 동성애 했기 때문에 폐비가 되었다. 세 번째 세자빈은 단종을 낳다가 산후풍으로 한 달 만에 죽었기에 시어머니 소헌왕후(세종의 부인)는 며느리 간택에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다.

 

궁궐에서 월래 윤 씨의 언니를 세조의 베필로 보러 찾아갔을 때 일이다.

하지만 윤 씨가 언니보다 말을 더 잘하고 똑똑하게 보여서 정희왕후 11살, 세조는 12살에 결혼을 하였다.

 

세조는 거사날(계유정난) 계획이 미리 들통나 측근들이 거사를 막았다. 수양대군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대자 윤 씨가 세조의 갑옷을 들고 나와 손수 입혀주며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그리하여 세조는 조선의 제7대 왕이 될 수 있었다.

정희왕후는 거사날에도 용기도 주고 정치적 사안에도 조언을 해주었다. 

소헌왕후(세종의 부인)가 아팠을 때도 수양대군의 집에 머물렀는데 정성을 다해 극진히 모셨다.

 

하지만

왕이 되기 전 박팽년의 누이 근빈 박 씨를 첩으로 들이고 정희왕후보다 오래 살았다.

또한 세조는 왕이 된 이후에는 신숙주의 딸인 숙원 신 씨를 첩으로 들였다

정희왕후는 질투를 할 수 없었다.

조선에서는 7거지악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내를 욕 안 얻어먹고 쫓을 수 있는 7가지 이유인데

1. 시어머니에 못하거나(사위는 장모에게 못해도 됨)

2. 아들이 없거나(아들을 못 낳는 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여자가 잘못)

3. 간통을 하거나(남편은 사랑채에 첩을 들여도 무방)

4. 첩을 들일 때 질투하거나 (질투가 나도 절대로 질투 안 나는 척해야 함)

5. 오랜 병에 걸렸거나 (평소 아무리 잘해도 아프면 쫓겨남)

6. 도둑질을 하거나 (그렇다고 쫓아내기 까기 하나?)

7. 말이 많거나(귀머거리 3년, 벙어리 3년, 장님 3년을 버텨야 조선에서 살아남기)

이런 애매모호한 기준으로 아내를 쫓아낼 수 있다.

한마디로 조선에서 여자로 태어나는 순간 천하의 대죄인 되는 것이다.

유교의 나라 조선에서 여자로 살아남기는 멀고도 험난한 길이었다.

 

또 속 썩이는 첩이 있었는데 세조가 몇 명의 첩을 들이는걸 애처가의 모습이라고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수양대군시절 다른 여자도 아니고 집안에서 부리던 여종 덕중이다. 집에서 매일 보는 종을 첩으로 들이다니...

세조는 나쁜 남자이다

덕중은 얼굴이 이뻐서 수양대군의 첩이 되었다. 그녀의 행동은 가관이다. 덕중이 낳은 아들이 4살에 죽자 외로운 마음에 내시였던 송중에게 연애편지를 썼다. 후궁은 왕의 여자이기 때문에 송중은 사형감이 된다. 송중은 세조에게 먼저 보고하여 세조는 극대노하고 그녀를 궁중에서 심부름이나 하는 나인으로 강등시켰다. 하지만 그녀는 정신을 못 차리고 이번에는 조카뻘 되는 귀성군에게 연애편지를 썼다. 이로써 귀성군은 연애편지를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억울하게 귀양살이를 하였다. 정희왕후는 집에서 부리던 종을 첩으로 삼아도 질투가 나도 절대로 질투 안나는 척해야 했다.

 

그리고 정희왕후는 피부병을 앓던 세조를 정성으로 보살폈고 세조가 죽고 난 후 능을 간소화하고 성종이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게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녀는 맏아들(의경세자), 둘째 아들도 먼저 보내고 남편까지 먼저 보낸다.

파란만장 삶을 살던 정희왕후는 향년 66세에 숨을 거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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